경찰은 혹시나 피해자가 매춘을 했고(마이애미는 매춘이 합법입니다) 그 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이미 소송 때문에 호텔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또 호텔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모습은 경찰과 호텔 양쪽에서 피해자를 반대로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브레넌은 길고 지루한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화면 프레임 하나 하나를 뒤진 끝에 최종적으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바로 3시 41분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던 남자였습니다. 이 남성은 안경을 쓴 흑인으로 키는 최소 190센티미터 이상에 몸무게는 135킬로그램 이상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체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화면에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올라타며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이 남성은 약 두 시간 후인 5시 28분에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로비, 주차장 카메라에 잡혔고 이후 한 시간쯤 지나 통 트기 전에 가방 없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는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갔구요.
호텔은 공항 근처에 있었으므로 캐리어를 끌고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보통 그 정도 크기의 짐은 방 안에 두고 다니는 게 보통이고 체크아웃할 때나 밖으로 가지고 나가죠. 왜 이 남자는 자기 짐을 체크아웃 전에 가지고 나가서 한 시간 뒤 빈손으로 돌아왔을까? 하나씩 지워나가던 용의자 명단에서 오직 이 남자 외에는 이런 의문스러운 점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저 가방에 피해자를 넣어서 옮겼다는 게 브레넌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문제는 가방 크기가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아 보였다는 점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가방은 잘만 하면 비행기 탈 때 머리 위 선반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경찰도 이 영상을 돌려보면서 별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브레넌이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정문의 실제 크기를 재어 본 뒤 화면 바닥에 있는 타일 크기와 남성의 신체 크기 등을 대조해 본 결과 이것은 일종의 착시였습니다. 남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가방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던 것이죠. 위 사진만 보면 캐리어 안에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워 보이지만 피해자와 용의자가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용의자의 신체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span style="letter-spacing: 0px;">타일의 너비 등을 기준으로 캐리어의 크기를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니 눈에 보이는 것 보다 캐리어가 꽤 크다는 걸 밝여냈습니다. 알몸이었던 피해자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습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px;">하지만 이것만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었으므로 브레넌은 더 세심하게 비디오를 관찰했습니다. 결정적인 단서는 남성이 엘리베이터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순간에 있었습니다. 바로 잠깐 엘리베이터 문턱에 가방의 바퀴가 걸렸을 때 남성이 두 손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이었습니다.</span>
비행기 타 보신 분은 알겠지만 수하물 규정상 넣을 수 있는 짐의 무게는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항공사 기본 규정이 23킬로그램까지죠. 대한항공 국제선도 100파운드(45킬로그램)을 넘어가면 캐리어로는 안되고 따로 부쳐야 합니다. 근데 저 거구가 자기 신체 크기에 비해 작아 보이는 캐리어를 두 손으로 끌어당깁니다. 엘리베이터와 플로어 사이 그 작은 틈에 걸릴 정도면 꽤 무겁다는 소리입니다. 공항 근처 호텔에 묵는 손님이면 무슨 이민가방을 싼 것도 아닐텐데 저렇게 짐이 무겁다? 피해자 진술에서 범인이 여러 명의 백인이라고 말한 점이나 억양이 루마니아쪽이었다든가 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브레넌은 이 사람이야말로 범인이라고 확정짓습니다.
동시에 한가지 더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용의자는 너무나 침착했습니다. 차분한 모습으로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고, 나갈 때도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나갔으며, 한 시간 남짓 지나서 불안해 보이는 모습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틀을 더 숙박한 뒤에야 호텔을 떠났습니다. 경찰일 적에 브레넌은 보통 사람이 폭행 사건을 저지를 경우 그대로 현장에서 잡히는 걸 여러번 보았습니다. 어쩔 줄 몰라서 덜덜떨거나 공황 상태에 빠져서 증거 인멸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성을 납치 강간한 후 심하게 폭행했다가 대상이 죽었다고 여겨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버려두고 나왔다면, 범행을 벌인 호텔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돌아와서 이틀을 더 지낼 수 있었을까요? 보통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다면 당장 짐 싸서 멀리 도망갔을 겁니다. 이 남자의 행동거지가 가리키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너무 능숙합니다. 분명 여러번 해 본 솜씨입니다.
2005년 11월 17일, 브레넌은 호텔 오너와 보험 조사원, 그리고 자신을 고용한 로펌의 변호사들을 다 불러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찍힌 남성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렸냐는 질문에 브레넌은 자신이 어떻게 용의자 명단을 압축해 나갔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브레넌의 논리를 쉽게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피해자가 백인 여러명한테 습격당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이 자가 확실합니다. 제가 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수사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신다면 이 자를 추적해보겠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해결되면 호텔 관계자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는 게 확실하게 증명되므로 법정에서 생길 부담이 줄어들게 되어 모두가 윈윈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쪽에서 진범을 잡아서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한다면 평판이 어떻겠습니까? 이 자가 얼마나 침착한지 보십시오. 피해자를 강간하고 죽을만큼 때렸는데 불안하거나 겁먹은 모습은커녕 여전히 차분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짓을 하고도 태연자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세요. 분명히 이번이 첫범째 범행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설명을 들은 호텔 관계자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강간범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긴 했지만, 토의는 손익 계산을 최우선으로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사회에 치부를 드러낼 것인가, 이 탐정에게 계속 돈을 지급해야 하는가 등등 말입니다. 브레넌은 고용주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쓰든 간에 계속 일을 진행할 수만 있으면 됐습니다. 범인을 잡고 싶다는 탐정의 본능이 꿈틀거렸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브레넌이 계속 이 일을 맡아 조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고용주의 태도는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브레넌은 오히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의지가 불타올랐습니다.
직원들로부터 받은 기록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방은 많고 직원 교대가 잦아서 고객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몇 스탭으로부터 거구의 안경 쓴 흑인을 봤다는 증언은 받았지만 투숙객인지 호텔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들린 방문객인지, 투숙객을 찾아 놀러왔다가 묵고 가는 손님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투숙객이 체크인할 때 신분증을 복사해 두는 원칙이 있긴 했지만 대충대충 하다보니 이미지가 다 뭉개져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믿을 만한 자료는 비디오 뿐이었습니다. 다시 용의자가 나온 장면만 죽어라 들여다 본 결과 대부분은 쓸모 없었지만 딱 한 군데 용의자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사람을 찾아냅니다. 탄탄한 체격의 흑인이었는데 "Mercury"라는 단어가 앞에 박힌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브레넌은 처음엔 1. 자동차 회사 머큐리, 2. 수성 3. 수은 등을 생각해봤지만 셋 다 별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의자가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남자는 꽤 자주 호텔을 방문했으며 레스토랑 쪽 카메라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모습도 확인되었습니다.두 사람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사람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아 보였습니다.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명찰 목설이를 달고 있었지만 크기가 작아서 호텔 카메라의 해상도 정도로는 글씨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브레넌은 나사에 연락해 혹시 해상도를 올릴 방법이 없냐고 문의했지만 그런 건 SF영화에서나 가능한 기술이었습니다.
다시 비디오로 돌아와 레스토랑 장면을 면밀히 살펴본 끝에 브레넌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살짝 뒤를 돌아볼 때 어떤 단어가 등에서 얼핏 보인 걸 발견합니다. 그는 여러번 비디오를 돌려본 끝에 이 단어가 "Verado"라는 걸 알아냅니다.
구글 검색결과 베라도는 보트의 엔진을 제작하는 회사 중 머큐리 마린이라는 곳에서 개발한 엔진의 이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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